2017년 10월 12일 목요일

신흥종교, 언제 출현했느냐의 문제가 아닌 누구를 좇는가의 문제

신흥종교, 언제 출현했느냐의 문제가 아닌 누구를 좇는가의 문제



한국교회에서 신흥종교, 신흥교단이라고 하면 그 본질을 파악하기 이전에 이단이나 사이비로 색안경 끼고 쳐다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나보다 조금 늦게 출발했다고 해서 새로 생겨난 모든 종교나 교회, 종단을 나와는 다른, 아니 잘못된 것으로 보는 것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더 나아가 신흥종교의 정의에 대해 알고는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남을 탓하고 비방하기 이전에 먼저 탄생배경과 그 본질을 알고 신흥종교에 대해 논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에 신흥종교란 과연 무엇인지 그 정의에 대해 알아보고, 올바로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보고자 이번 기획을 마련했다.


◆ 신흥종교(新興宗敎)의 정의

신흥종교는 기성 종교에 대하여 새로 일어난 종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기성의 종교 단체에서 분파되어 나온 것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현실적인 경향을 띠며, 같은 의미로 신종교(新宗敎)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기성 종교와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로, 기성종교는 이미 제도화되어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린 종교인 데 비해 신종교는 역사가 짧고 아직 제도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종교를 일반적으로 가리킨다.


◆ 신흥종교의 범위

호남신학대의 이진구 교수는 “신종교의 허용 범위는 학자들마다 견해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며 “한국의 경우 세계종교인 기독교와, 동양의 고전종교인 불교, 유교, 도교 등을 제외한 나머지 종교를 모두 신종교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1860년에 등장한 동학(천도교)을 최초의 신종교로 보고 동학의 영향을 받고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등장한 증산교, 원불교, 대종교 등을 모두 신종교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도 19세기 말에 등장한 천리교 등을 ‘신종교’로 부르는 경향이 있지만 197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종교들에 대해서는 ‘신신종교’라고 부르면서 비교적 역사가 오랜 신종교들과 구별하기도 한다.

이에 이진구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도 150년의 역사를 지닌 천도교 등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닌 신종교들과 10여년의 역사를 지닌 최근의 신종교를 ‘신종교’의 범주에 함께 포함시키는 것보다는 이들을 구별할 새로운 용어의 제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왜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가

한국에서는 신흥종교라면 무조건 유사종교 내지는 사이비 종교로 단정해 버리는 경향이 농후하다. 기독교나 불교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종교들은 역사적으로 검증을 거쳤기 때문에 고전종교로 불리는 경향이 있지만, 신종교들의 경우에는 역사가 짧고 아직 사회적 검증과 공인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적 이미지를 부여받는 경우가 많다.

신종교를 창시한 교주나 지도자들이 도덕적 일탈이나 사회적 문제(재산 갈취, 성폭력, 헌금 강요, 집단 자살 등)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신종교 일반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부정적인 것으로 고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특정한 종교집단의 문제이지 신종교 전체의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신종교 전체를 부정적 시선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특히 신종교 중에는 기성 종교가 지닌 문제점, 예를 들면 기성종교의 경직화, 형식화, 부패 등을 개혁하고 혁신하려는 동기에서 창시된 것이 많다.

기성종교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비치는 신종교들을 무조건 비난하는 경향이 있음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 신흥종교의 상생과 진리 찾기

요즘 들어 종교편향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는 한다. 종단의 크기와 세력에 따라 국가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제각기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 중 하나로 이를 극복하고자 여러 종교 단체들이 상생을 외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종교 간 갈등의 해소와 종교편향의 방지’를 주제로 한국종교연합에서 평화포럼을 개최하기도 했다. 포럼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종교인이 힘을 합하면 못할 게 없다”며 “종교의 역할은 사랑과 용서로 종국에는 지혜를 주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종교학자들과 각 종교의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것, 그리고 각각의 경서에 기록된 것을 토대로 보자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다른 성격과 방법론을 가진 종교이지만 결국에는 진리(眞理)라는 것으로 귀결된다(작년에 열린 ‘종교법’에 대한 담론에서 한신대 김경제 교수 발언).”

종교 간 상생의 문제로 혹 진리가 무엇인지, 분별할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은 아닌지, 그 많은 종교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해 이진구 교수는 “종교 간의 경쟁을 진리투쟁으로 본다면, 그리고 진리는 궁극적으로 승리한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신종교들에 대한 국가나 사회의 인위적 통제는 불필요할 것”이라며 “진리에 기초한 종교는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고 거짓에 기초한 종교는 사라질 것”이라고 전했다.

오늘날 학자들이 말하는 신흥종교의 정의 안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참 진리를 찾기에 노력해야 한다.

비록 늦게 출발해 신흥종교라는 꼬리표가 달렸더라도 그 옛날 예수처럼 하나님과 함께하는 참 목자가 있는 곳을 찾아 나아가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한 때임을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새로운 것을 좇아서 나오다

신흥종교든, 신종교든 이들은 새로 생겨난 종교(단체)로 정의할 수 있다. 즉, 기존의 것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으로 그 원뿌리는 기존의 종교와 같을지라도 그 나중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초림 때로 한 번 올라가 보자. 예수 초림 당시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인 구약성경을 목숨같이 여기며 그 안에 있는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했다.

특히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필사하며 백성들에게 가르친 이들로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기다려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정작 예수가 유대 땅에 왔을 때에 그를 나사렛 이단으로 정죄하며, 결국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그들의 허물을 고하고 회개할 것을 외친 예수가 눈에 가시였을 것이다.

이 당시 예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장로들에 비하면 분명 늦게 출발한 종교지도자라 할 수 있다. 비록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부터는 하나님은 예수와 함께하셨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새롭게 출현한 예수를 믿고 따른 이들을 향해 신흥종교를 믿는다고 이단이요, 사이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종교지도자들이 처음 시작했을 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시작되었다지만 알고 보니 이들이 좇은 것은 사단, 마귀였음을 예수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으로 시작했지만 사단, 마귀를 따라간 이들이 새로운 것을 좇은 신흥종교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 시간의 차이가 아닌 본질의 차이

신흥종교를 무조건 이단이나 사이비로 정죄하는 분위기라면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수도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비해 늦게 출현했기에 이단 내지는 사이비로 봐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명 예수는 하나님이 함께하신 참 목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신흥종교라는 것이 시간상의 차이를 두고 나타난 종교를 지칭하는 말로 쓰여서는 석연치 않은 문제들이 존재한다.

오늘날에 와서도 이 문제는 마찬가지다. 장로교를 짚어보자. 장로교 또한 많은 분파와 교파로 나뉘어졌다. 신사참배를 문제로 갈라져 나온 고신파와 그 이후 우후죽순 생겨난 여러 교파들이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이들도 신흥종교라 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가 모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행태를 봤을 때는 2천년 전 예수 초림 때와 다르지 않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들 또한 자신들의 허물을 고하고, 잘못을 회개하라고 외치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목자를 향해 ‘이단’이라는 멍에를 씌우고 굴레를 씌우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분별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는 이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의 몫만이 아니라 예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몫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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